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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1. 제중원 설립, 우연인가 필연인가?

한성중보

서양의학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한성순보(1884.3.27.)

서양의학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한성순보 기사(1884.3.27.)

  1884년 12월 4일 저녁,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우정국 개국 축하 연회가 벌어졌다. 조선 정부의 고위관리와 서구 열강의 외교관들이 모두 참석했다. 그야말로 ‘별’들의 잔치였다. 이 연회가 끝나갈 무렵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이 자객의 칼에 찔려 죽어갔다. 역사적 대사건인 갑신정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미국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그는 당시 일본인 의사를 제외하면 조선에 거주하던 유일한 서양식 의사였다. 그는 민영익을 정성껏 치료하여 완치시킴으로써 서양의학의 우수성을 입증했다. 그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여세를 몰아 서양식 국립병원의 설립을 제안했는데, 조선 정부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럼 제중원 설립은 역사적 우연인가? 아니다. 역사는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시 조선에서 서양 근대의학의 수용과 서양식 국립병원의 설립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19세기에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은 서양의학에 관심이 많아 여러 저술을 남겼다. 1877년 부산에는 제생의원(濟生醫院)이라는 서양식 일본인 병원이 생겨 조선인들도 진료했다. 지석영은 종두법을 익힌 후 1879년 역사적인 종두 시술에 성공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 고종과 조선 정부가 서양 근대의학의 도입을 능동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종과 조선 정부는 1876년 문호개방 이후 국가 차원의 개화 프로젝트를 세우고 그 실천에 나섰는데, 이때 의료 근대화에도 주목했다. 1881년 일본에 파견한 조사견문단(朝士見聞團)을 통해 서양식 의료를 탐색했다. 이듬해에는 전통의학에 기초한 국립 의료기관이었던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를 폐지하여 국가 의료정책의 전환을 모색했다. 1884년 정부 기관지 《한성순보》를 통해 백성들에게 서양의학 교육의 필요성을 알렸다. 그 해에 미국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서양식 병원 설립을 제안하자 이를 허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갑신정변 때 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한 사건은 서양식 국립병원 설립의 촉매제로 작용했다. 


 

2. 제중원,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1885년 4월 고종과 조선 정부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약칭 외아문, 지금의 외교부) 산하에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했다. 당연히 외아문에서 병원 명칭을 지어 고종의 재가를 받았는데, 그 최초 명칭은 ‘광혜원(廣惠院)’이었다. 그러나 고종과 조선 정부는 2주일 만에 이를 무효화하고 ‘제중원(濟衆院)’이라고 새로 명명했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광혜원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고 제중원이라고 부른다.
  고종과 조선 정부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역적이 되어버린 홍영식의 집(관행상 국가 재산이 되어 있었음,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자리)을 제중원 부지와 건물로 사용하도록 했다. 넓은 한옥이었기에 진찰실, 수술실, 입원실, 대기실 등 기본 시설을 갖출 수 있었다. 제중원 진료가 시작되어 환자들이 늘어나자, 고종과 조선 정부는 1886년 10~11월경 제중원을 구리개(지금의 을지로 입구 하나은행(구 외환은행) 본점 자리)로 옮겼다. 
  고종은 외아문 독판(督辦, 지금의 장관)이나 협판(協辦, 지금의 차관)에게 병원장 격인 제중원 당상(堂上)을 겸임시켰다. 그래서 온건개화파의 대표적 인사인 김윤식을 시작으로 민종묵, 남정철 등 외무 관료들이 제중원 운영을 총괄 지휘했다. 외국어에 능숙하고 서양 정세에 밝은 젊은 관리들은 제중원 주사(主事)로 발령을 받았다. 특히 제중원 초창기에는 우리나라 최초 국립 영어 교육기관인 동문학(同文學) 출신들이 배치되었는데, 고종과 조선 정부가 제중원에 거는 기대가 컸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아직 서양 의술을 갖춘 의사가 없었다. 그래서 고종과 조선 정부는 알렌에게 환자 진료를 맡겼다. 그 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헤론(John W. Heron), 하디(Robert A. Hardie), 빈턴(Cadwallader C. Vinton), 에비슨(Oliver R. Avison) 등 선교사 겸 의사들이 제중원 의사로 고용되어 근무했다.

개원 당시의 제중원 개원 당시의 제중원

 

3. 제중원, 조선인 환자를 치료하다
  제중원에서 치료한 환자는 얼마나 되었을까. 1886년 알렌과 헤론이 작성한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 따르면, 제중원은 개원 이래 첫 1년 동안 1만 46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일반 백성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걸인, 나병 환자로부터 위로는 궁궐의 귀인까지 조선의 전 계층이 망라되어 있었다. 여성 환자들도 800명이 넘었다. 양반층은 주로 왕진을 요청했으며, 지방에서 진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도 적지 않았다.
  제중원에서 첫 1년 동안 치료했던 환자들의 주요 질환을 살펴보면, 말라리아가 가장 많았다. 소화불량, 각종 피부병, 성병(매독) 등도 많은 편이었다. 그밖에도 결핵, 나병, 기생충병, 각기병 등이 있었다. 외과 수술을 받은 환자는 모두 150명이었는데, 팔과 다리 등의 절단 수술이 많았다. 괴사병 환자의 대퇴골 절제수술, 척추골 수술 같은 대수술도 있었다. 백내장 수술도 열 건이나 되었다. 입원 환자 중 폐렴 환자, 각기병 환자 등 일곱 명은 사망했다.

조선 정부가 마련한 제중원 운영규칙 조선 정부가 마련한 제중원 운영규칙

 

4. 국립 ‘제중원의학당’, 서양의학을 가르치다
  1886년 3월 29일, 의사 양성을 위한 국립 '제중원의학당'이 문을 열었다. 당시 조선 정부의 근대 인재 양성 프로젝트는 다각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1883년 영어 통역관 양성을 위해 동문학을 세웠고, 1886년 이를 육영공원으로 발전시켰다. 1888년에는 사관생도 양성을 위해 연무공원을 개설했다.
  조선 정부는 제중원의학당 운영지침을 마련하고 부지와 건물을 제공했으며, 학생들을 선발했다. 제중원 의사 알렌은 조선 정부 예산으로 의학교육에 필요한 도구를 구입하고, 교수들을 섭외했다. 조선 정부는 처음에 16명의 학생을 선발하고, 그중 12명을 본과에 올려 보냈다. 학생들은 영어, 물리, 화학, 해부 등 기초과목은 물론 의료기구 사용법, 약 조제법, 환자 간호법 등을 배웠다. 수업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였다. 성적 우수자는 표창을 받았고, 중도 퇴학은 외아문 독판과 교수회(敎授會)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했다.
  1890년 무렵 아쉽게도 제중원의학당의 의학교육은 중단되었고, 결국 졸업생은 한 명도 배출되지 않았다. 조선 정부의 재정난으로 인한 의학당 운영예산의 부족, 알렌 등 미국인 교수진의 이탈, 학생들의 선교사 및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 학생들의 학구열 부족 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910년경 - 제중원의 초대 원장이었던 김윤식 
외아문 독판 겸 제중원 당상 김윤식

 

5. 조선에서 가장 안쓰러운 군주, 고종
  고종 하면 우리는 보통 비운의 국왕이라 기억하지만, 사실 그는 아주 만만찮은 군주였다. 그의 동도서기론은 상당히 견고한 신념이었고, 그 신념을 실현에 옮길 의지도 있었으며 노력도 기울였다. 제중원을 비롯해 통리기무아문, 별기군, 기기창, 우정국, 육영공원, 연무공원 등은 고종의 총체적 근대화 프로젝트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조선에서 가장 안쓰러운 군주이기도 했다. 그의 시도가 옳은지 그른지 따질 여유도 없을 만큼, 주변 상황이 조선과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가 옳다고 믿는 사상과 정책을 마음껏 펼치기에는 여건이 너무 나빴다. 제중원이 운영되었던 1885~1894년만 살펴보더라도,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너무 심했고 조선을 마치 식민지처럼 다루었다. 위안스카이는 총독처럼 위세를 부리며 고종의 폐위까지 시도했다. 고종이 청나라의 눈을 피해 근대화와 자주화를 도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 정부의 재정난도 심각했다. 19세기 내내 기근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나라의 곳간 사정이 신통치 않았는데, 문호개방 이후 쌀값이 폭등하고 청나라의 각종 경제침탈이 거세지면서 정부의 돈줄이 말라버렸다. 고종 곁에는 함께 근대화 정책을 펼쳐갈 인재와 지지세력 마저 없었다.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는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스스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고, 김윤식 등 온건개화파는 청나라를 보는 시각이 고종과 달랐던 나머지 고종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과 조선 정부가 구상했던 수많은 근대화 정책이 알찬 결실을 맺을 리 없었다. 제중원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제중원 설립자 고종 국립병원 제중원을 설립한 고종

 

 

6. 파란만장했던 1894년
  하물며 1894년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해였다. 전라도에서 시작된 동학농민전쟁, 그로 인해 조선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전쟁의 혼란을 틈타 일본이 강압적으로 밀어붙인 갑오개혁. 세 개의 사건 모두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물론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국제관계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대사건들이었다.
  당시 조선으로서는 그 중 어느 한 사건만 일어났어도 감당하기 어려울 판이었는데, 세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특히 1894년 7월 23일 새벽,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해버린 사건은 고종에게는 치명타였다. 고종은 국왕으로서의 자존심과 권위에 큰 타격을 입고 자연인으로서의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아야 했다.
   조선 정부도 온전한 정부로서의 권위와 기능을 상실한 채 외세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조선 정부가 제중원 운영권 이관을 공식 승인한 날짜다. 1894년 9월 26일은 일본에 의한 타율적 개혁인 갑오개혁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즉 일본이 조선의 국정을 장악한 상황에서 고육지책으로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894년 11월 20일, 알렌이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 총무 엘린우드(F. F. Ellinwood)에게 보낸 편지에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다. 알렌은 제중원 문제를 전적으로 자신이 해결했다고 자부했다. 9월 26일 제중원 운영권 이관을 승인받은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알렌은 일본이 제중원을 원하는 바람에 문제가 있었다고 언급했다. 일본이 제중원을 수중에 넣고 싶어 했던 것이다. 실제로 1890년에 일본인들이 제중원 진료권을 넘겨받으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알렌은 이런 상황이 잘 해결되어 미국북장로회에서 제중원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만족할 만한 가교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일본도 저를 고맙게 여기는 한편, 국왕(고종은)은 제가 조선을 구했다고 계속 말하고 있다”면서 이 내용은 극비사항이라고 덧붙였다.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다. 알렌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양자의 의견을 교환하고 조정하는 데 일종의 메신저 역할을 했던 것이다.

 

 

7. 고종(조선 정부)이 제중원을 위탁 운영한 까닭
  그렇다면 알렌은 제중원에 관해 고종(조선 정부)과 일본의 동의를 어떻게 이끌어냈을까? 거꾸로 말하면 고종(조선 정부)과 일본이 미국북장로회에 제중원 운영권을 넘겨준 이유는 무엇일까? 
  고종과 조선 정부는 일본이 조선의 국정을 장악한 상황에서 제중원을 일본에게 빼앗기는 것보다는 미국북장로회에 운영을 위탁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더구나 고종과 온건개화파 관료들은 일찍부터 미국이 사심 없이 약소국 조선을 도와줄 수 있는 나라라고 기대했던 만큼, 청일전쟁 국면에서 미국에게 무언가 도움을 청하기에 제중원 운영권 이관이 유리한 카드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일본도 조선을 순조롭게 장악하고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외교적으로 미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중원 운영권 이관을 묵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추론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1895년 2월 내무대신 박영효가 언더우드와 에비슨에게 명성황후의 지원을 받는 국립대학 설립 구상을 상의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박영효가 국립대학 설립을 선교사업으로 ‘위장’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는 국립대학을 조선 정부가 주도하는 국가사업으로 시작하면 일본인들의 간섭을 받아 실패하거나 그들에게 학교를 빼앗길 것이 두려워서였다. 이로 미루어볼 때 고종이 미국북장로회에 제중원 운영권을 넘겨준 것은 조선 정부가 계속해서 제중원을 운영할 경우 일본인들에게 빼앗길 것을 우려했던 데서 나온 고육지책일 가능성이 높다는 데 더욱 심증이 간다.
  1894년 9월 26일 이후 에비슨은 제중원을 단독 운영했다. 동시에 그는 미국북장로회 소유의 병원을 설립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1904년 에비슨 등은 제중원을 떠나 서울 남대문 인근에 세브란스병원을 개원했다. 이듬해 대한제국 정부는 미국북장로회에 제중원 보수 비용을 지불하고 제중원 부지와 건물(1886년 11월경 조선 정부는 제중원을 을지로 입구로 이전했음)을 환수했다.

대한제국의 제중원 환수 약정서 대한제국의 제중원 환수 약정서

 

8. 결론: 제중원은 왜 중요한가? 
  우리나라 근현대 의료사, 특히 서양식 의료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1885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이 개원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중원은 고종과 조선 정부가 19세기 조선의 제반 의료 상황에 대처하여 서양의학 도입을 능동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1877년 부산에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서양식 병원이 등장했고, 1879년 송촌 지석영이 역사적인 종두 시술에 성공했지만, 왕조시대였던 만큼 어명으로 서양식 병원이 설립되어 신분과 지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모든 백성을 상대로 서양식 의료를 펼치게 된 것이야말로 우리나라 근대 의료사의 진정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제중원은 두 가지 경로를 통해 한국 근대 서양의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우선 대한제국 정부의 의학교와 광제원을 통해서였다. 정부와 한국인들이 제중원을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얻은 귀중한 경험은 의학교와 광제원 등 국립 의료기관의 설립과 운영, 나아가 의사 양성 등을 통해 한국의학 발전에 직간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두 번째 경로는 세브란스병원을 통한 것이었다. 제중원에서 일했던 여러 의료선교사들의 경험은 개신교에서 설립하고 운영한 세브란스병원의 발전뿐만 아니라 의사 양성 등을 통해 한국의학의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개화기 국립병원 계통도 개항기 국립병원 계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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