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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헌기 교수의 사진한장

깃 발

조회수 : 567 등록일 : 2020-08-21

깃발

서울대학교 병원 내분비내과 임상강사  조 영 민

나 자신을 뒤돌아 볼 틈도 없을 정도로 바쁘게 지나가는 일상(日常)에서 시집이나 수필집 한 권 읽는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사치처럼 느껴지는 지금이지만, 예과를 다닐 때만 해도 낙엽지는 캠퍼스 벤취에 앉아 시집을 들추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호사(豪奢)를 부리던 적이 있었다.

국내외의 여러 시인들을 좋아했지만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청마(靑馬) 유치환 선생의 시가 유독 마음에 들었다. 그의 행복이라는 싯귀에 나오는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숫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봇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라는 구절을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의 청소년들은 공감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우표, 전보, 우체국이라...... 각종 업무 및 광고 관련 이메일의 홍수 속에서 사는 나로서도 이런 말들을 잊어버린 지 오래인 것 같다. 한데, 며칠 전 참으로 흥미로운 이메일을 하나 받았다.
<민선생님 수상록 원고 청탁>이란 제목으로 시작해서 “선생님과의 따뜻한 交感을 永遠히 글로 남깁시다.“로 끝을 맺는 신선하고도 따스한 느낌을 주는 전자서한(電子書翰:이메일이나 전자우편보다 정감이 가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이었다.
외국에 보낸 논문의 교정 시한이 임박해서 한참을 궁싯대던 주말 오후에, 그래! 골치 아픈 원고 교정보다 나도 오랜 만에 글이라도 한 번 써보자는 사치심이 발동하여, 그림책을 가지고 와서 같이 놀자는 세 살박이 딸아이에게 과자를 하나 집어줘서 달래고 어이없다는 눈으로 흘겨보는 아이 엄마의 시선에도 아랑곳않는 강심장(强心臟)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1992년도에 겨우 본과에 발을 디뎠던 나로서는 감히 민헌기 선생님과의 교감을 글로 남길 자격이 있노라고 말하기조차 어렵다는 사실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강의 시간에 기억이 나는 것이라곤 1993년도 초겨울 2학년 강의실에서 내분비학 통합과정 교육을 받을 때에 ‘당뇨병의 병인과 분류’에 관해서 강의를 하시던 모습 뿐이다. 그 강의는 당신의 젊음을 고스란히 바친 연건 캠퍼스에서의 마지막 학생 강의였다.
강의를 듣기 전부터 선배들을 통해 민 선생님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들은 지라, 막상 마지막 강의를 듣는다고 생각하니 영광스럽기도 하고 또한 아쉬운 마음도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 강의 내용은 잘 떠오르지 않지만 높으신 연세에도 불구하고 힘이 넘치는 카랑카랑한 음성과 일목요연한 설명이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두고두고 기억될 사제지간(師弟之間)의 동고동락(同苦同樂)의 기회를 가지지는 못했지만, 일상의 매너리즘에 빠져 해이해 질 때면 항상 뒷머리를 때리는 선생님의 말씀이 하나 있다.

 “Prove it!"

 1998년도에 내분비내과 의국원으로 입국하는 입국식에서 민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당신이 정말 내분비내과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Prove it! 증명을 해 봐.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연구해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도록 증명을 해 보여야 해요....” 갓태어난 어린 새의 기억에 어미새의 모습이 각인(imprinting)되듯이 뇌수(腦髓)에 박히는 말이었다. ‘그래, 나도 이제 내분비의국의 일원이 되었으니 내분비내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는 걸 한번 증명해 보여야겠다. Prove it! Prove it!......'

 증명이라.... 증명이 뭘까? 데카르트는 진리의 근본을 탐구하다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증명을 통해 ’생각하고 있는 나의 존재‘만은 확실한 사실이요 진리이며 이를 기반으로 모든 철학적 명제를 방법적 회의를 통해 증명해 나갔다. 결국 모호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이 증명이 아닐까?
내가 내분비내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면 환자 진료에 있어 부족함이 없도록 하여 ’역시 서울대학교 병원 내분비내과 출신을 다르구나.‘라는 평을 받아야했을 것이고,
또한 연구활동을 통해 내분비학의 발전에 기여도가 높은 논문들을 발표해야 했을 것이다. 내분비내과에 들어온 지 5년이 되는 지금 돌이켜보니 내가 무엇을 하나라도 증명을 해 보였는지 부끄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른다.
언젠가는 민 선생님 말씀에 부끄럽지 않게 대답할 수 있을 때가 오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으로 스스로를 위안해 본다.

 선배님들로부터 술자리에서 전해 들어 알고 있는 민헌기 선생님을 잠시 추억하면서 문득 청마(靑馬)의 깃발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야 흔드는
영원(永遠)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純情)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민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선배 선생님들의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이제 부쩍 커버린 내분비내과가 되었지만, 민 선생님께서 미국에서 내분비학을 공부하시고 귀국하신 후에 느끼신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당시 진료, 교육, 연구의 모든 면에서 미국에 비해 턱없이 뒤떨어진 현실에서 선생님께서 경주하신 노력은 ‘소리없는 아우성’이었을 것이고 머나먼 이상에 대한 향수(鄕愁)에 젖은 손수건처럼 애태우셨을 것이다.
하지만, 민 선생님과 여러 선배 선생님들의 내분비학에 대한 열정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매달린 채 하염없이 나부끼기만하는 깃발이 아닌 그 깃대 위에서 새하얀 날개를 펴고 해원(海原)을 향해 날아가는 백로(白鷺)였을 것이다.
새파란 바다에 새하얀 색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모습...... 이중섭(李仲燮)의 황소 그림 중 하나에서 보았던 푸른빛이 감도는 바탕에 굵고 거친 터치로 칠한 새하얀 황소가 보이는 상서롭고 역동적인 대비(對比)와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수직적인 상승을 꿈꾸는 이념의 푯대가 머나먼 해원까지의 공간적 거리에 의해 좌절할 때의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 하지만 힘차게 나부끼며 언젠가는 그리움의 세상으로 날개짓하며 날아갈 그 깃발을.....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바로 남곡(南谷) 민헌기 선생님이 아니셨을까?

힘차게 나부끼는 깃발로부터 “Prove it! Prove it!"하는 소리가 환청이 되어 귓전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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