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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헌기 교수의 사진한장

가을소묘

조회수 : 750 등록일 : 2020-08-21

가을소묘

가을은 언제부터인가?
달력이 9월로 넘어갈 때부터 가을의 시작인가?
아니, 열린 창으로 들어와 복도에 떨어진 낙엽 한 잎이 가을의 전령이 아닐까?
마을 앞 길섶에 피어있는 이슬 머금은 보라색 구절초가 자태를 뽐내기 시작할 때일까?
이맘때에는 시골집 안마당의 석류나무마다 보석 같은 열매가 알알이 내비치고 헛간 초가지붕에는 둥근 박이 널려있다. 누렇게 고개 숙인 가을 논에는 벼메뚜기 뛰어 놀고 과수원의 나무마다 휘어지게 달려있는 사과와 배는 가을의 상징이다. 산에는 밤나무 아람이 익어 터지고 상수리나무 아래에는 떨어진 도토리 쫓는 다람쥐가 바쁘다. 짧은 가을 햇살에 핀 야생화에 철 지난 나비가 날아들고 여름날 산딸기 따먹던 자리엔 머루와 다래가 익어간다. 암자 옆 샘터 가에서 산 사자 불그스름한 열매는 새들을 기다리고, 호숫가의 가을은 불타는 산록의 단풍보다 물위에 어른대는 단풍에서 더욱 진하게 느껴진다.

문득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저 멀리서 손짓을 하고 높아진 하늘아래 고추잠자리 떼들이 한가롭다. 여름날 중천의 붉은 햇살은 이미 그 빛깔을 잃어 노랗고 그늘이 서느랍다. 밤에 휘영청 떠있는 밝은 달에도 여름의 끈적거림이 사라지고 차가운 빛을 대지에 내리 쏟는다.

가을의 소리를 듣는다.
산사 법당 밖의 풍경소리도 가을바람에 정겹다.
길어만 가는 가을밤에 뒷간에서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에 잠 못 이루며 뒤척이고 지나가는 소슬바람이 괜스레 문풍지를 흔들고 가는 소리에 선잠을 깬다. 낮은 산 잔솔사이로 날아오르는 푸드득 날개짓의 살찐 장끼소리 또한 가을의 소리가 아닌가? 여름의 시원했던 계곡 물은 흘러가고 들을수록 물소리가 차갑게 느껴지면 벌써 가을도 중반이다.

가을이 지나간다.
가을은 삼십 삼천을 울려 퍼지는 저녁 예불의 종소리처럼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갈대가 휘날리는 갯가에는 철새들이 남쪽으로 비상하고 산 능선의 억새가 바람결에 은빛 파도치면 늦가을이다. 추수 끝난 들녘에 이른 서리 내리고 나무는 한 줄기 바람에 우수수 가을 잎을 털어 내면 계절은 속절없이 지나가고 겨울은 갑자기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뜰에는 홍시 다 따내고 하나 달려있는 까치 밥이 홀로 겨울을 맞이한다.

도시의 가을은 어떠한가?
허공에 벌집처럼 매달린 우리가 사는 아파트, 냉난방 조절되는 밀폐된 사무실, 일년 열두 달 주위풍경이 똑같은 출퇴근길의 지하철, 거리마다 가득 찬 소음과 악취, 매연으로 희뿌연 하늘 아래에서는 가을을 느낄 수가 있다. 다만 사람들의 바뀐 옷차림과 매스컴에서 떠들어대는 가을 특집프로그램에서나 계절을 알 수 있다. 그래도 가을비 온 후 길바닥에 늘어붙은 플라타너스 잎은 길마다 깔려있는 여름의 아픈 기억들을 덮어버리고 가까이 다가온 산은 빛깔이 달라졌다. 샛노란 은행단풍잎만으로도 도시는 한결 가을다워지고 집안의 국화는 늦도록 가을의 향을 뿜는다.

이윽고 겨울이 장바닥에서 곁불을 쬐고 있는 사람들 등뒤로 성큼 다가오면 가을은 종종걸음으로 멀리 달아나 버린다. 계절의 감각을 잃어버린 도시에서는 겨울 오고 나면 지나간 때가 가을이었던 것을 안다.
아직 남은 이 가을이 지나기 전, 계절을 느끼려 산이나 들로 나가 볼까나?
이제 쉰이 넘어가는 내 나이도 인생의 가을이 아닐까?
춥고 긴 겨울이 오기 전에 모든 것을 예비하여야 할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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