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민헌기 교수의 사진한장

단상과 斷想

조회수 : 341 등록일 : 2020-08-21

단상과 斷想

이 문 규

단상.

여행지에서 보는 경관과 만나는 사람들은 나를 새롭게 돌아보게 한다.

그곳이 제주도나 대구일 때도 그렇고, 빈이나 시드니일 때도 마찬가지이다.

지친 일상에서 떠난다는 해방감과 익숙하지 않은 자연과의 만남, 그리고 낯설지만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사라들. 내 기억에 남아있는 최초의 여행지는 대전이었던 것 같다.

6살 때로 기억하는데, 돌아가신 할머니와 함께 가는 장거리 여행이었고 무척이나 설레었던 생각이 난다.

증기기관차가 뿜어내는 검은 연기가 궁금해 창밖으로 자꾸 머리를 내밀었는데, 할머니가 손을 저으며 말리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은 자동차로 2시간 정도면 도달할 수 있는 대전이지만, 내 어릴 적 기억으로는 하루 종일 기차 안에서 지냈었고, 저녁때에 도착했었다.

서울에서와 같은 모습의 집들이었지만 모든 것이 달라 보여, 어린 마음에도 무척이나 신기했었다. 나이가 들면서 설악산, 부산, 홍도, 제주도 등 우리 나라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신선한 충격과 설레임을 만끽하였다.

역시 여행은 좋은 것이었다. 군보 레지던트 시절 해외 여행은 꿈도 못 꾸고 3년을 지냈고, 군 제대 후 전임의가 된 후 비로소 해외 여행의 기회가 주어졌다.

일본 나고야를 가게 되어 이러 절한 준비를 하였는데, 당시 효제 세무서에서 레지던트 시절의 국세 완납증명서를 받아보니 레지던트 3년 동안의 내 수입이 1,500만원으로 기록되어 있던 것이 기억난다. 당시 민헌기 교수님과 함께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각종 수소과 절차, 일보 내에서의 활동 등 모든 것이 생소하고 어색했는데, 민 교수님은 학회장에서는 물론 음식점에서도 유창한 일본어와 함께 매우 자연스럽게 행동하시는 것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고, 그 때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아, 일본어를 배워야 하겠구나. 그 후 생전 처음으로 촌놈이 미국 구경을 하게 되었는데, 미국 가기 전까지는 무척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준비를 했었지만, 미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는 무척 자유스러움이 느껴졌었다.

때가 마침 겨울이었고 특히 도착하는 날 눈이 내렸기 때문에 주위가 온통 흰색이었다.

흰색이 주는 신선함과 순수함 속에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미국인들의 생활은 언뜻 보면 무척 엉성해 보였지만, 시간을 갖고 찬찬히 들여다보면 Fundamental이 충실히 닦인, 중심 잡힌 것이라는 느낌이 온다. 내가 서 있는 이 곳에서 150년전 미국인들이 처절하게 살아가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에 문득 전율이 느껴지곤 했다.

어떻게 하여 이 사람들은 150년전에 도시계획을 바둑판 식으로 정하여 추진할 수 있었을까? 도시가 만들어지자마자 대학을 설립했다는 것이 사실일까?

미국의 공용어가 독일어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는데 사실인가?

만일 영국인이 아니고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인들이 미국에 처음으로 정착했다면 오늘날의 미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등등 미국에 대한 의문이 줄줄이 이어졌고, 일부에 대하여는 답을 확인했으나 아직도 잘 모르는 것들이 많다.

어리석게도 멕시코인 들이 미국에 내준 땅은 금과 은이 묻힌 황금어장이었다.

나라가 망한 후 오백년 도읍지를 찾아 인걸이 간데 없음을 슬퍼한 선비가 우리의 과거에 있었듯이 아마도 멕시코의 시인들은 자기들의 옛 땅을 지구가 망할 때까지 그리지 않을까?

우리의 조상들이 좁은 한반도에서 때로는 어리석게 때로는 너무도 출중하게 노력하며 삶을 영위한 흔적이 많이 있음에 나는 놀라고 있다. 그런데 외국에 여행할 때마다 내가 가는 그 지여그이 외국인 조산들도 놀랄 만한 치열함과 진지함으로 매우 오래 전부터 살아온 사실을 알게 되며, 나를 더욱 겸손하게 만든다.

앞으로 1000년이 지난 후 우리의 후손들은 오늘날의 대도시 지역의 유적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재개발- 斷想. 아마도 의국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민 교수님의 꾸중을 들은 제자들 가운데 제 1 호는 내가 아닐까 생각한다. 인턴생활을 마치고 레지던트로 올라가는 무렵, 나는 신경과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경과에는 군보 레지던트 TO가 없는 상태였으므로 가을이 시작될 즈음 나는 신경과의 꿈을 접고 내과를 지망하기로 결심하고, 당시 내과과장이셨던 민 교수님께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레지던트 시험을 약 2-3주 남겨 둔 어느 날 신경과 과장님께서 급히 호출하셨고, 신경과에 군보 레지던트 TO가 날 것 같다는 요지의 말씀이 계셨다. 나는 당연히 내과를 포기하고 그 내용을 과장님과 또한 경쟁상대인 친구들에게 알렸으며, 대학원은 내과가 아닌 신경과에 원서를 접수하였다.

그리고는 늠름하게 신경과 시험준비를 조금씩 하고 있었는데, 레지던트 시험원서접수 마감 하루 전날, 신경과의 군보 TO가 무산되었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 하늘이 캄캄하게 느껴졌고, 신세 한탄을 할 틈도 없이 민 교수님 방으로 달려가서 다시 받아달라는 말씀을 드렸다. 민 교수님은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시며, “자네가 합격하게 되면, 자네의 동기 가운데 한 사람이 떨어져야만 하지 않겠나?”라고 꾸중을 하시고, 면접 접수를 주지 않겠다는 말씀까지 하셔서 나는 거의 시체가 되다시피 하였다.

그로부터 시험보기까지의 기간은 하루하루가 갈등의 연속이었지만, 결국 최선을 다하여 시험을 치루었고, 다행히도 시험에 합격하게 된 것을 보면, 아마도 민 교수님께서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실제로 영점을 주시지는 않은 것 같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 때 시험에 합격하고 난 후 마음속으로 수십번 뇌되었던 말이다.

지금도 선생님을 뵈면 어렵고 조심스럽지만, 내가 선생님을 대하는 심정은 이와 같이 아주 무서운 내과과장님의 이미지에서 조금씩 인간적인 이미지로 변화해 간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님, 제자들이 선생님의 뒤를 이을 수 있을 때까지 건강하게 사시면서 지도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전글 이전글이 없습니다.
다음글 말없는 臟器

이메일주소 무단수집 거부

본 웹사이트에서는 이메일 주소가 무단 수집되는 것을 거부하며,
위반 시,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처벌됨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뷰어 다운로드

뷰어는 파일 문서 보기만 지원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뷰어로는 문서 내용을 수정하거나 삭제, 편집 할 수 없습니다.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사용하는 문서는 한글2002, 워드, 파워포인트, 엑셀, PDF(아크로뱃리더) 5가지 입니다.

사용하시는 컴퓨터에 해당 뷰어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경우 뷰어를 다운로드 받아 각 개인 컴퓨터에 설치하셔야 합니다.
뷰어는 사용하시는 컴퓨터에 한 번만 설치하시면 됩니다.

전체 검색

전체 검색